서울파이낸스 요약본
국민연금 ESG 진정성 시험대 ‘석탄투자 배제전략’
국민연금이 ‘탈석탄’을 선언한 시기는 지난해 5월 말경이다. 국가적 행사인 P4G 서울 정상회의가 개최되기 직전이었다. 당시는 국민연금이 벤치마크(benchmark)로 삼고 있는 국제적인 연기금들이 대다수 탈석탄을 선언한 상태였고, 탈석탄 국내 공적•민간 금융기관의 수도 이미 100개에 달했던 때였다. 국민연금은 사실 탈석탄 금융 열차의 막차를 탄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탈석탄 선언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국내외 언론에 다수 보도되었다. 국민연금이 자본시장에서 가지는 상징성과 영향력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탈석탄을 지속적으로 촉구해 왔던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환경운동연합도 만시지탄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즉각적으로 환영 논평을 발표한 바 있다. 국민연금의 탈석탄 대열 합류로 우리나라 기업과 금융기관의 기후위기 대응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5개월 허비, 그리고 합리적 의심
그런데 탈석탄 선언 이후부터 진행되어 온 일련의 과정을 복기하면 미덥지 못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국민연금의 ‘석탄투자 제한전략 기준’은 1년 5개월이 넘도록 마련되지 않고 있다. 용역 최종보고서를 참조하여 올해 5월부터 자산별•지역별•이행시기와 방법 등 단계적 시행방안을 수립하고 있고 연내에는 공개할 계획이라는 게 국민연금의 입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석탄투자 제한전략 기준’은 전 정부에서 충분히 수립될 수 있었다. 국민연금은 탈석탄 선언 이후 5개월 후인 지난해 11월에야 ‘석탄채굴•발전산업의 범위 및 기준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하였다. 그리고 올해 3월 17일 중간발표 공청회를 거쳐 최종 용역보고서의 내용을 4월 말경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 보고하였다.
탈석탄 선언 이후 국민연금은 왜 용역을 즉각 발주하지 않고 5개월을 끌었을까. 일각에서는 대선 이후 새 정권의 스탠스를 염두해 두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이러한 정치적 의혹은 필자 역시 품고 있다. ‘5개월의 지체된 시간’은 기후위기를 대하는 국민연금의 태도일 수도 있다. 기후재앙을 막기 위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2030년이다. 국가, 지자체, 기업, 금융기관, 개인 등 각 주체들에게 ‘즉각적인 기후행동’, ‘최대한의 기후행동’을 촉구하고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국민연금에게 아직 부재하다는 방증으로 읽힌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안일하다.
20% 배제, 50% 포함한 ‘선택적인 선택지’
속도보다 더 중요한 점은 석탄투자 제한전략을 어떤 기준으로, 어느 정도 수준으로 설정하고 적용하느냐이다. 앞서 언급한 국민연금의 정치적 고려 의혹 또는 기후위기 인식이 필자의 합리적인 추정에 근거했다면, 기준 설정과 수준 그리고 적용은 기후위기를 대하는 국민연금의 실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용역을 수행한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은 국민연금이 석탄투자 제한전략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주요 의사졀정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적용범위(산업범위, 석탄종류, 자회사 포함 범위), 정량기준 지표 선정(매출비중, 생산량•생산비중, 설비용량•설비비중), 정량지표 강도 설정(석탄비중 30% 기준, 50% 기준), 정성기준 도출(녹색채권 투자허용 여부, 에너지 전환 기업 투자허용 여부) 등이다. 이를 토대로 용역사는 3가지 옵션을 도출하고 있다. △옵션 1 : 석탄 매출비중 30%, 에너지 전환 기준만 도입하지 않을 경우, △옵션 2 : 석탄 매출비중 30%에 모든 정성기준을 도입하는 경우, △옵션 3 ; 석탄 매출비중 50%에 모든 정성기준을 도입하는 경우다.
지표 강도 50%는 그 자체로 ‘그린워싱’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하자면, 석탄기업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정량기준으로 석탄 매출비중 20%는 왜 고려하지 않았냐는 점이다. 또 탈석탄 선언을 한 실효성 자체를 무화시켜 버리는 50%는 왜 굳이 포함시켰냐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참조되는 글로벌 탈석탄 리스트(Global Coal Exit List)에서는 기준이 20%이다. 물론 국민연금이 20%를 설정할 경우 더 많은 기업이 탈석탄 기업으로 규정되고 이에 따른 국민연금의 투자제한과 투자철회에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후위기 가속화에 따라 자본을 할당하는 금융기관들은 지금보다 더 강한 ‘2030 기후행동’을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요구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감안하면 20%는 당연히 고려 수준에 포함해야 하는데도 선택지에서 원천 배제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은 특히 국내 전체 업종의 주식과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유니버셜 오너(Universal Owner)라는 지위를 가진 대규모 연기금이다. 이는 국민연금의 수익률이 일국의 경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국민연금은 개별적인 기업의 성과보다는 경제성장의 패턴에 관심을 가지고 경제의 체질 개선에 노력해야 한다. 즉 투자대상기업 전체의 미래 경쟁력과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활동을 해야만 국민연금의 장기적인 수익률을 보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 세계는 지금 고탄소 사회에서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국민연금은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좌초자산이 될 가능성이 높은 석탄기업들을 기후경쟁력을 가진 재생에너지 기업으로 빠르게 전환시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한 강력한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투자수익을 통하여 국민의 노후를 보장하고자 하는 국민연금의 방향과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석탄 매출비중 20%는 그런 의미를 지닌다.
석탄 매출비중 50%는 명백한 석탄기업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석탄 매출비중 49%는 석탄기업이 아니라는 논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황당한 지표 강도를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에너지 전환 계획 :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
국민연금이 석탄투자 제한전략 기준을 연내 설정하고 수탁자책임 지침을 개정한다면 2023년부터 이를 적용할 가능성이 높다. 용역 보고서에는 2023년 적용을 가정하여 앞서 언급한 ‘3가지 옵션’에 따른 석탄 투자액의 변화 추이 분석이 제시되어 있다.
옵션 1의 경우, 2023년 4조원 대에 이르는 국민연금의 석탄기업 투자액은 2026년 이후 모두 사라진다. ‘에너지 전환 계획’이라는 정성기준을 도입하지 않은 결과다. 석탄 매출비중 각각 30%와 50%에 모든 정성기준이 도입되는 옵션 2와 옵션 3의 경우에는 2026년에도 국민연금 석탄기업 투자액은 각각 1조원 대와 3조원 대가 유지된다.
옵션 3을 선택하는 경우 국민연금이 왜 탈석탄 선언을 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즉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그린워싱(green washing)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는 말이다. 최악이다. 국내 전력시장을 고려한 옵션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무의미한 옵션을 굳이 왜 넣었는지 의문시 되는 대목이다. 혹여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의 의도가 반영된 건 아닐까, 옵션 3은 옵션 2를 선택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비판을 무디게 하는 일종의 속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옵션 3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그런 심리적 효과 말이다. 이러한 음모론적 생각이 들 정도로 옵션 3, 즉 석탄 매출비중 50% 선택지는 실로 황당하다.
옵션 2는 정성기준인 ‘에너지 전환 계획 명시 기업 투자허용 여부’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기준은 기업이 자체적으로 수립한 에너지 전환 계획, 또는 정부 정책에 따른 에너지 전환 계획상 향후 정량기준(30%) 충족이 가능하다고 판단할 경우에 기존 투자를 유지하거나 조건부 신규 투자를 허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경우 ‘에너지 전환 계획 명시 기업 투자허용 여부’의 기준이 중요하다. 기후과학에 따른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의 마지노선인 1.5도 이하 목표에 부합하는 계획인지, 즉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2030년까지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소 45% 이상 감축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행 수단을 제시하고 있는지 등 얼마나 엄격하게 기준을 설정하느냐가 핵심이다. 그렇지 않으면 옵션 2 역시 그린워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민연금이 탈석탄 선언의 진정성이 있다면 ‘에너지 전환 계획’ 인정에 대한 강한 기준을 제시하여야 한다.
외부자극에 밀리고 밀려 겨우 반응하는 관료화된 국민연금
국민연금이 ‘석탄투자 배제전략’과 관련하여 어떤 기준을 설정할지는 아직 모른다. 앞서 언급한 3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할지, 아니면 이외의 기준을 만들어 낼지 오리무중이다.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50% 무게설’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오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내심 불안하기도 하다. 필자의 기억에 국민연금은 ESG와 관련하여 늘 ‘보수적인 선택’을 해왔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스스로 ‘신중한 선택’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국내외 동향에 비추어 보면 그 선택은 결국 ‘신중을 가장한 보수적 선택’인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그러한 선택도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자기결정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에 귀를 닫거나 방어하다가 밀리고 밀려서 마지못해 수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9년 6월 PRI 가입과 12월 의결권 행사지침에 책임투자 조항 마련, 2015년 ESG 고려와 공시법인 국민연금법 개정, 2016년 가습기 살균제 가해 기업에 대한 관여활동,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2019년 11월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 발표, 2021년 5월 탈석탄 선언 등이 결정된 과정과 내용을 보면 그렇다. 그러다 보니 국민연금이 발표한 정책마다 내용상 ‘과감성’이 부재했다. 조직 자체가 ‘관료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관료화는 국민연금 특유의 복잡한 거버넌스에 기인한 점이 크다.
탈석탄 선언만 해도 그렇다. 사실 국민연금기금의 탈석탄 선언은 1.5도를 위한 ‘탄소중립’의 관점에서 나왔어야 했다. 국민연금기금의 투자 포트폴리오상에서 발생하는 금융배출량(financed emissions)을 감축하여 넷제로(net-zero)를 달성한다는 큰 프레임 하에서 탈석탄 선언이 이루어지고, 이를 위한 탈석탄 로드맵, 더 나아가서 탈화석연료 로드맵을 수립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국민연금기금의 ‘탈석탄 선언문’ 어디에도 포트폴리오 넷제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만큼 기후위기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다는 방증이다. 이는 자기 주도성의 부재가 낳은 당연한 결과물이다. 관료화된 조직과 문화에서는 ‘보여주기’(showing)만 하면 된다. 원대한 상상력, 더 큰 틀에서의 고민 등 자기 주도성 따위는 필요 없다. 외부의 자극, 딱 그만큼만 반응하면 된다.
‘넷제로’ 대비한 강도 높은 석탄투자 배제전략 필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우선 ‘석탄투자 배제전략의 기준’을 제대로, 그리고 강하게 수립해야 한다. 그래야만 향후 추진해야만 할 국민연금기금의 탄소중립, 즉 투자 포트폴리오 넷제로가 엉키지 않기 때문이다. 2040년 이후 기금이 고갈되기 때문에 우리는 넷제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탄소중립 시대에 포트폴리오 넷제로는 금융기관이라면 피할 수도, 마냥 미룰 수도 없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경제와 금융의 파괴적인 위기인 그린스완(green swan)이 현실화 된다면 국민연금이 그토록 외치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률은 물거품일 뿐이다.
필자는 기후위기 등 ESG와 관련하여 국민연금에 2007년부터 관여활동(engagement)을 하고 있다. 무려 16년이다. 국민연금과 마주하면 매번 거대한 벽을 마주한 느낌이다. 일부 작은 성과도 거두었지만 큰 좌절이 더 많았다. 그 좌절의 기억들이 축적되어 국민연금에 대한 필자의 견해가 상당히 불편할 정도로 편향적으로 형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국민연금에 ‘변화’라는 희망의 끈을 놓은 적이 없다. 국민연금이 투자의 관행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ESG를 통합하고 투자대상기업에 관여활동을 전개한다면, 우리의 삶이 녹색사회, 포용사회로 1cm라도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해야만 국민연금도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탈석탄 선언, ESG의 진정성을 강도 높은 ‘석탄투자 배제전략’ 수립을 통하여 증명해야 한다. 관료화 되었다는 세간의 인식을 불식시키는 ‘과감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국민연금에 대한 필자의 인식이 지독한 편견이라면 이번 기회에서 그러한 편견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기후행동으로 자기 주도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국민연금은 국내외적으로 그린워싱, ESG 워싱의 주범이라는 오명에 오래도록 갇히게 된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argos6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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