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의 권한과 행정명령
ㅣ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김태한 수석연구원 기고 ㅣ
파리협정 탈퇴, 출생 시민권 폐지, 교육부 폐지…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100개 이상의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격렬한 논쟁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밀어 붙이고 있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처음에는 ‘그래도 시원 시원하긴 하다’하는 생각을 하다 가도, 이제는 ‘저래도 되는 건가?’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한 때 ‘민주주의의 등대’라고 불리던 미국이, 갑자기 절대왕정 국가로 돌아간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미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 길래, 대통령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모든 걸 뒤집어 엎을 수 있을까? 예상을 못한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트럼프라 해도 민주주의 국가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하고도 문제는 없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를 문다.
l 헌법 2조와 대통령 행정명령
우선 트럼프 자신은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해도 문제없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다음은 트럼프 대통령의 2019년 발언이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헌법2조를 읽어보세요. 대통령에게 믿지 못한 만큼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미국 헌법 2조는 “행정권은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속한다(The executive Power shall be vested in a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그리고 “대통령은 모든 법률이 성실히 집행되도록 주의하며, 미합중국의 모든 공무원에게 직무를 부여한다(He shall take Care that the Laws be faithfully executed, and shall Commission all the Officers of the United States).”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에게 행정권의 행사에 대한 포괄적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쏟아내고 있는 정책의 상당 수는 대통령 행정명령(Executive Order)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바로 행정명령의 헌법적 근거가 바로 2조다. 미국의 ‘대통령 행정명령’은 트럼프가 말 하는 것처럼 ‘대통령 마음 대로’까지는 아니지만, 실제로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제도인 것은 맞다.
ㅣ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도 행정명령
대통령 행정명령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비단 트럼프 대통령만이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8년 임기동안 총 277개, 바이든 대통령은 4년동안 총 162개의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대공황을 겪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3,700건이 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고 알려졌다.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도 행정명령이었다.
미국 내 인종차별 철폐에 기여한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연방정부 계약에 인종차별 금지’도 유명한 행정명령 가운데 하나다. 링컨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이후 수정헌법 13조와 민권법(Civil Rights Act)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ㅣ우리나라 대통령령과는 다른 미국의 대통령 행정명령
우리 헌법에도 유사한 이름을 가진 ‘대통령령(令)’이라는 제도가 있지만, 그 성격은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령은 법률의 위임을 받아, 그리고 법률의 취지 내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매우 제한적이고 실무적인 권한이다. 그리고 대통령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국무회의 등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한다.
반면 행정권 행사에 대한 포괄적 권한을 위임 받은 미국의 대통령은 별도의 절차 없이 독자적 판단만으로도 행정명령을 발령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의회나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행정명령을 발동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정부의 조직구성 및 운영, 대외관계, 국가안보 등 광범위한 영역에 대해 즉각적인 정책 실행을 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의 대통령들은 취임과 함께 자신이 공약한 정책을 행정명령으로 바로 실행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우선 행정명령으로 실행시켜 놓고, 필요하면 추가적인 입법을 추진하는 식이다.
체계상은 법률의 하위에 있지만, 행정명령이 사실상 일반법과 유사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해석도 늘고 있다. 다만 한 번 제정되면 그 효과가 지속되는 일반적인 법률과의 차이점이라면, 행정명령은 대통령의 임기 동안만 유효하다는 점 정도이다. 차기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이어 받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이후 가장 먼저 한 것도 전임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취소한 것이었다.
최근 들어 기존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행정명령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법률과의 연계성을 가지는 것이 정당성 확보에 유리하기는 하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기존 법률과 연결시키는 경우도 더러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와 캐나다에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1977년에 만들어진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꺼내 들기도 했다. 이 법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대통령에게 상대국에 경제 제재를 가할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마약문제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이법에 근거해 관세인상 행정명령을 내렸다.
ㅣ행정명령 막을 수 있나?
행정명령은 막강한 권한이지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회와 법원을 통해 통제가 가능하다.
의회는 행정명령의 근거가 되는 법률을 개정하거나 폐지함으로써 행정명령을 통제할 수 있고, 행정명령의 집행에 필요한 예산을 삭감해서 실질적 이행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상원과 하원이 공동으로 무효화를 결의하는 경우에도 행정명령은 효력을 상실한다.
하지만 현재 상원과 하원 모두 공화당이 우위다. 더욱이 트럼프 1기와 달리, 지금은 친트럼프 세력이 공화당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 최소한 다음 중간선거가 치뤄지는 2026년 11월까지는 의회를 통한 통제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다음은 법원에 의한 통제다. 연방대법원을 비롯한 법원 또한 행정명령이 헌법이나 연방법률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심사할 수 있고, 위법한 행정명령을 무효화할 수 있다.
미국은 주법원과 연방법원의 이중 사법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연방정부가 당사자인 사건의 판결은 연방법원에서 이루어 진다. 연방법원은 주별 1개 이상의 연방지방법원, 13개의 연방항소법원, 마지막으로 연방대법원으로 구성된다. 헌법재판소는 따로 없다.
미국 법원은 행정명령 관련 소송의 심리를 비교적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다. 보통은 1년이내, 경우에 따라서는 6개월 내에 지방법원부터 대법원의 최종판결까지 내려진다. 따라서 대법원의 판결이 가장 중요하다. 지방법원에서 특정 행정명령의 효력정지를 내린다 하더라도, 금세 대법원에서 뒤집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방법원의 판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동의를 받아 임명하는데, 모두 종신직이다. 연방지방법원과 순회법원 판사의 구성은 지역 별로 다양하다. 그래서 누가 어떤 정치세력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최종심에 해당하는 연방대법원의 판사구성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가 6명, 민주당 지명이 3명으로 보수성향이 많다.
ㅣ거세지는 사법부에 대한 압력, 결국 믿을 건 판사의 양심 뿐
물론 공화당이 지명한 대법관이라고 해서 반드시 트럼프에게 유리한 판결을 한다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최근 내려진 미국국제개발처(USAID)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의 트럼프 정부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가 USAID의 해외원조 자금 지급을 중지 시켰는데, 하급법원에서는 이를 자금 지급을 재개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대법원에 곧바로 항소했는데, 대법원이 5대 4로 트럼프 정부의 요청을 기각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첫번째 재임시절 지명했던 보수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도 기각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공화당 지지층은 에이미 대법관을 배신자로 낙인 찍고 공격에 나서고 있으며, 트럼프 자신도 판사 탄핵을 언급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진보, 보수 성향 나눌 것 없이, 트럼프 정책에 반대되는 판결을 내린 판사가 극우세력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의회와 법원의 구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중간 선거 전까지는 폭주하는 트럼프를 막을 견제장치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미국도 한국도 나라의 명운을 몇몇 판사의 양심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당분간은 지속될 것 같다.
※ 본 칼럼은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이 한경ESG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칼럼 전문은 아래의 링크에서 자세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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